
오래전 방영된 드라마 《선덕여왕》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미실이 자신이 버린 아들 비담에게 건넨 말이다.
“여리고 여린 사람의 마음으로 너무도 푸른 꿈을 꾸는구나.”
그때는 자식을 버린 비정한 어머니라는 이미지에 대한 반감 탓이었을까. 그 말속에 깃든 애틋함과 역설을 가볍게 지나쳤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다시 들은 그 문장은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1400여 년 전의 미실도 인간 세상의 비정함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이 언제나 선한 사람의 편도 아니고, 옳은 뜻을 품었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결과에 이르는 것도 아니라는 것쯤은 알 만한 나이가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사람에게 실망하고, 믿었던 것들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애써 지켜온 마음조차 한순간에 부질없어지는 순간을 겪는다.
그럼에도 나는 다시 사람을 믿고, 내일을 생각하고, 지금보다 조금은 나은 세상을 꿈꾼다. 이토록 연약한 내가 그래도 꿈을 내려놓을 수 없는 이유는 거창한 무엇 때문이 아니라 그저 지금의 이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이다.
내가 만난 이순신도 그러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전쟁으로 모든 것이 무너진 가혹한 시간이었다. 이순신은 처음부터 불굴의 영웅담 속 인물이 아니었다. 그 전쟁통 속에서도 조정은 탁상공론과 제 안위에 매달렸고, 백성의 삶은 뒷전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군사를 먹이고 입히는 일부터 백성들이 살아갈 방도를 마련하는 일, 전선을 살피고 군량과 무기를 준비하는 일까지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의 삶 어느 것 하나 내려놓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푸른 꿈이 아닌가.
사백여 년이 흐른 지금, 나는 다시 이순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오래된 기록 속에서 이순신의 삶을 찾아내고, 그가 싸웠던 바다와 그가 걸었을 길을 따라 걷는다. 이순신을 만난 자리도, 이순신을 기억하는 방법도 다른 그들이 놀랍게도 어느 한 지점에서 만난다. 이순신이 그러했듯, 저마다의 어깨에 커다란 짐을 기꺼이 짊어진 채로.
이순신을 더 많이 알린다고 해서 세상이 갑자기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기념관 하나를 더 세우고, 학교 하나를 더 만들고, 그의 이름을 딴 사업을 하나 더 시작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다시 이순신을 말한다. 기록을 읽고, 사람들을 모으고, 아이들에게 그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우리가 왜 아직도 이순신을 기억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생각해보면 이 또한 얼마나 푸른 꿈인가.
그러고 보면 이순신과 오늘 그를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아주 긴 시간이 놓여 있으면서도 이상하리만큼 닮은 무엇이 있다. 자신이 바라는 세상이 당장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곳을 향해 기꺼이 하루를 바친다. 자신이 시작한 일이 어디에 가 닿을지 알지 못하면서도 뒤를 따를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전하고 남기고자 최선을 다한다. 어쩌면 이들은 진즉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꿈이란 이루어질 것을 미리 알고 꾸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현실을 견디며 내일을 기약하는 사람들에게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이순신을 말하는 사람들의 꿈이 어디에 가 닿을지를 섣불리 말하고 싶진 않다. 어떤 꿈은 이루어질 것이고, 어떤 꿈은 미완으로 남을 것이다. 서로 다른 꿈들이 부딪혀 때로 생채기를 남기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그들은 묵묵히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것이 푸른 꿈의 운명이기도 할 테니.
다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오늘 이순신이라는 한 사람을 이토록 오래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가 그의 삶을 기억했고, 기록했고, 가르쳤으며, 다시 다음 사람에게 건네주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자리에는 그렇게 자신이 알지 못하는 내일을 위해 무엇인가를 남겨놓은 사람들의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다.
지금 나의 길 역시 그 꿈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이어져 온 길일 것이다. 그리고 이미 그 길 위에는 많은 이들이 서 있다. 우리 모두는 예전의 그들이 이루어놓은 것보다,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그 푸른 꿈에 훨씬 더 큰 빚을 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진서]
고석규비평문학관 관장
제6회 코스미안상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