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배 칼럼] 낯선 간판 아래, 우리말

이윤배

시내 번화가를 걷다 보면 낯선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분명 우리나라의 거리인데도 간판들은 온통 그 뜻을 선뜻 짐작하기 어려운 외국어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간판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가게마다 우리말 이름을 달고 있다면 이 거리가 얼마나 색다르게 느껴질까 생각해 보았다. 정겹고 아름다운 우리말 이름들을 떠올리자 마음 한쪽에 씁쓸한 질문이 고개를 들었다.

 

“우리말로는 가게 이름을 아름답게 붙일 수 없는 걸까”

 

한글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세종은 글을 몰라 제 뜻을 펼치기 어려웠던 백성도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도록 새 문자를 창제했다. 그 뜻을 담아 자음은 사람의 발음 기관을 본뜨고, 모음은 하늘과 땅과 사람의 형상을 바탕으로 삼아 체계적으로 구성했다. 이처럼 백성을 향한 마음과 과학적인 원리가 어우러진 한글의 탄생 과정은 『훈민정음 해례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창제 원리와 사용법을 설명한 이 책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한글은 한국어를 적는 기호로써 사람을 향한 애정과 철학이 담긴 문자이기도 하다. 누구나 제 생각과 마음을 글로 펼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이 문자로, 우리는 오늘 어떤 말을 주고받고 있을까. 간판이나 방송 제목에서 국적 불명의 어려운 외국어나 외래어를 만날 때마다, 그 느낌을 살려 전할 우리말은 정말 없는 것인지 되묻게 된다.

 

그 물음은 내가 평소 쓰는 말에도 닿는다. 휴대전화 화면을 오가는 짧고 축약된 말들을 들여다보며 나 역시 마음을 전할 말을 너무 서둘러 고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언어는 뜻을 전달할 뿐 아니라, 생각을 깊게 하고 감정을 다듬으며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다. 그런데 빠른 반응과 자극적인 표현을 좇다 보면 상대를 헤아리며 말을 고르는 일에는 소홀해지기 쉽다. 요즈음 말에 담기는 정성과 온기 역시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 안타깝다.

 

물론 언어도 시대와 함께 변하는 것은 당연하다. 새로운 말이 생겨나고 익숙했던 말들이 사라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짧은 말로도 얼마든지 마음을 전할 수 있다. 다만 말을 빠르게 주고받는 동안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고 내 뜻을 온전히 전하는데 필요한 말들은 놓치지는 않았는지,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볼 일이다.

 

나는 가끔 오래된 책 속 문장을 읽다 놀란다. 서둘러 뜻만 전하지 않고, 상대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말을 고른 흔적이 선명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 문장 앞에서는 잠시 읽기를 멈추고 내가 평소 쓰는 말들을 되짚어 본다. 언어는 한 마디로 그 사람의 얼굴이자 품격이다. 내가 건네는 말 한마디에서 상대는 나의 됨됨이를 판단하고, 또 자신을 대하는 내 마음까지 짐작한다.

 

신중하게 고른 말은 글로 남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누군가의 마음에 여전히 살아 있게 된다. 한글은 그 말들을 기록하며 우리의 기쁨과 슬픔을 담아온 보물이다. 아이에게 불러주던 자장가의 노랫말도, 전쟁터에서 가족에게 보낸 편지도 한글로 남아 그 안에 깃든 사랑과 그리움을 오늘까지 전하고 있다. 그토록 많은 마음을 담아온 글자로 과연 나는 오늘 어떤 말을 남기고 있을까. 번화가의 간판을 보며 품었던 질문은 어느새 나에게 다시 돌아왔다.

 

그 질문 앞에서 한글을 지킨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곱씹어 봤다. 맞춤법을 바로잡고 외국어 사용을 줄이는 것도 물론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한글의 가치를 온전히 지킬 수는 없다. 일상에서 누군가에게 말을 건넬 때 내 생각과 마음을 정확하고 따뜻하게 전할 수 있는 우리말을 정성껏 고르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렇게 정성껏 고른 말을 한글로 기록하고 나눌 때, 그 안에 담긴 삶의 경험과 문화 또한 다음 세대로 온전히 이어질 수 있다.

 

한글의 미래는 이처럼 우리가 날마다 고르고 쓰는 말 속에서 더욱 굳건해진다. 누군가를 위로하는 한 문장, 내 삶을 진솔하게 기록한 한 줄의 글이 한글에 새로운 온기를 불어넣어 주기 때문이다. 백성이 제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문자는 오늘도 우리 곁에서 그 일을 묵묵히 이어가고 있다. 이제 한글에 어떤 마음을 담아 전할 것인지는 지금의 우리에게 달린 셈이다. 한글은 우리가 자신의 소중함과 가치를 다시 깨우쳐주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이윤배]

(현)조선대 AI·SW 학부 명예교수

조선대학교 정보과학대학 학장

국무총리 청소년위원회 자문위원 

호주 태즈메이니아대학교 초청 교수

한국정보처리학회 부회장 

이메일 : ybl7736@naver.com

 

작성 2026.10.07 10:22 수정 2026.10.07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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